아마도 (한수지 작가 작품의) 한 관람객에게 보내는 메시지
서현석
한수지 작가는 2019년, 핀란드의 레지던시에서 만난 브라질 작가 다니엘라 아베라(Daniela Avelar)와 끝말잇기를 하듯 글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한수지 작가는 언어를 통한 소통의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던 차였습니다. 놀이처럼 시작된 교신은 진지한 생각의 공유로 이어졌고,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영감의 교환은 온라인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영상작품 <오늘 나는 단어 아마도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II>(2020)는 아마도 이 언어적 왕래가 궁극적으로 이르게 된 잠정적 결론을 요약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영상에서 두 화자는 각자의 문장을 각자의 언어로 읽습니다. 두 언어가 서로를 번역하고 있는지는, 두 언어를 모두 아는 사람에게가 아니라면 미지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아마도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아베라의 문장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어로 전달되는 한수지 작가의 문장들은 번역 그 자체에 관한 질문들로 펼쳐집니다. 서로의 문장들은 번역을 거치는 대신 번역을 전경화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이 아닙니다. 한 형태의 데이터를 다른 형태의 데이터로 변환하는 모든 행위가 ‘번역’입니다. 번역의 문제는 곧 데이터의 형태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는 석사 논문에서 데이터를 “3차원 공간에 놓인 현상, 기억, 사실 또는 감정들이 납작하게 변환되어 저장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원형의 의미’를 충실하게 옮기는 행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신자의 뉴런에 도착하기까지 본래의 형태는 무수한 개념적, 물리적 변형과 왜곡을 거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치 디지털 세계의 모든 데이터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번역은 그리하여 무수한 “새로운 길”들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화자는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번역은 유기체적입니다. 새로운 사고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성장하고 변형되고 사멸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는 수신자에게 ‘도착’하지 않고 새로운 번역의 경로를 ‘개척’합니다.
영상 속 화자의 이러한 발언이 영상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뉴런에 도착하는 과정 역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말해진 문장을 한국어에 익숙한 수신자가 청취한다 하더라도 변형으로부터 자유로운 ‘원형 그대로’의 전달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같은 언어로 이뤄지는 대화라 할지라도 각자가 지닌 단어의 의미들은 불안정하게 진동하며, 소통은 다차원적으로 겹치는 진동의 폭의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발생합니다. 그 진동은 이미 발신자가 지닌 의미체계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관습, 제도, 권력, 패권이 스며들어 있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한국어로 작성된 이 메시지를 당신의 감각과 세계관에 따라 ‘번역’하고 계신 것입니다.
데이터의 물리적 형태 역시 과격한 변형을 거칩니다. 한수지 작가가 만드는 신체적 신호는 공기의 파장을 통해 마이크에 도달하여 전기 신호로 변형되고 이는 다시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됨과 동시에 이분법적 체계로 파편화된 채 수치로 저장되며 이 일련의 수치를 ‘재생’하는 장치 및 스피커에 의해 다시 공기 파장으로 전환되어 수신자의 청각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기술적, 물리적 절차를 곧 ‘번역’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개념적인 확장을 이룰 것입니다. 이 확장적 사유 속에서 ‘본질’을 ‘있는 그대로’ 접하려는 의도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는 이 글 역시 한수지 작가의 의도를 번안하기보다는 새로운 사고를 생성하는 과정입니다.) 메시지는 “메타몽처럼” 외형을 바꿉니다.****
(그런 면에서 언어는 자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변종이 발생하는 유기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코로나에 감염되거나 면역 체계를 작동시키는 생리현상 역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는 자연의 질서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모든 데이터가 변형을 거칠 수밖에 없는 거라면, 외형의 변형은 곧 ‘본질’의 변형이기도 한 걸까요? 아니, 변하지 않는 ‘본질’이란 게 있는 걸까요? 언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지는 걸까요? 그러한 변형 속에서 어떻게 소통은 가능한 걸까요?
인문학이 ‘탈구조주의’라 일컫는 사유 속에서 언어는 제한된 의미의 망을 조직하는 대신 무한하고 유기적인 결들을 펼쳐냅니다. 그것이 20세기 후반의 사유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의미가 “흐려지거나, 모호해지거나, 애매해”*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사실 변형/가공/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늘리기, 삭제하기, 붙여넣기, 복사하기, 합성하기, 왜곡하기, 뒤틀기, 자르기 등등”**** 무수한 재편집과 변형이 발생하는 것이 곧 ‘번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소통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 원리는 ‘오역’에 가깝게 작동합니다. 오차범위 안에서 진동하는 오역의 폭에 따라 우리는 그럭저럭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통해 전달받는 메시지는 ‘아마도’ 저의 의도일 거라고 파악되는 바에 대충 접근할 따름입니다. 물론 정확한 메시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개로 이뤄진 가능성들의 조합에 불과할 것입니다.
물론 변형/가공/왜곡을 거치면서까지 이 구태의연한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전달하려는 것은 20세기 인문학을 거들어주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체나 물질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소통의 방식, 그에 대한 사유의 도래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디지털이라고 하는 기술의 발전과 시기적으로 거의 중복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탈구조주의는 마치 디지털 기술의 원리를 예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기술이 작동하는 방식은 인간의 사유 방식을 닮을 수밖에 없는 거죠. 디지털 데이터는 끊임없는 재편집과 재가공을 거칩니다. 사실, 위에 인용한 한수지 작가의 작품 중 한 구절은 ‘번역’에 관한 말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늘리기, 삭제하기, 붙여넣기, 복사하기, 합성하기, 왜곡하기, 뒤틀기, 자르기 등등”의 기술은 디지털의 보편적인 기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재편집과 재가공으로부터 자유로운 ‘원형’을 전제하는 것은 디지털 세계에 있어서나 탈구조주의에 있어서나 불가능합니다. “번역의 시작점과 끝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디지털 역시 마찬가지겠습니다. 디지털은 곧 언어인 것입니다. 그것은 방대한 ‘오역’의 지평을 펼칩니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변종이 발생하는 유기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디지털은 자연의 질서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디지털은 인간의 사고를 구조적으로 재구성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디지털이 나아가 인간의 사유 방식 및 ‘번역’에 대한 관점을 역제안한다는 점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번안하는 번역의 의미란, 곧 데이터의 형태를 바꾸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모든 디지털 재현은 곧 번역 과정이며 모든 번역되는 표상은 디지털의 형태를 닮습니다. 둘은 모두 인간 지능의 거울이자 연장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는 언어와 디지털 모두 가시적인 표상의 차원 이면에서 거대한 조직과 규칙을 따라 작동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는 그 거대한 패턴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체계화된 포괄적 지식에 이르는 것보다 작은 단절과 연결점들, 새로운 경로들을 관찰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말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것은 아마도 작은 연결점들에 구조적인 비밀이 숨어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아마도 ‘오역’이 발생하는 실질적인 현장에서의 과학수사와 같은 행위일 것입니다. 그 현장에는 디지털의 속성에 대한, 언어의 작동 원리에 대한 단서들이 해독/오독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3차원 공간에 놓인 현상, 기억, 사실 또는 감정들이 납작하게 변환되어 저장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저장’의 의미에는 물론 변형의 가능성이 내재합니다.) 그것은 3차원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의미’라는 비물질적인 현상이 전달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실로 인간의 정신이나 내면과 같은 비가시적인 현상이 3차원 공간의 물성과 인터페이스를 이룰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이 비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대신 이를 통찰한 한 위대한 물리학자를 어렴풋이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에르빈 슈레딩거는 의식의 문제를 물질적인 차원과 비물질적 세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파악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전달되는 신호들이 어떻게 의식이라는 비물질적인 영역과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공기의 파장이 어떻게 뉴런을 거쳐 비물질적인 의식에 도달하는가? 작은 입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본 이 물리학자는 비물질적 세계에 대한 단단한 벽을 직시했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물질과 비물질이 만나는 접점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는 없을 거라고 그는 단언했습니다.
21세기의 인간 각자는 각자의 단절된 세계 속에서 ‘아마도 그럼직한’ 대충의 의미 작용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통’이란 아마도 그러한 필연적 고립에 대한 개념적 방어기제일지도 모릅니다.
한수지 작가는 번역의 영역이기도 한 디지털 세계 속에서 단절이 발생하는 현장들로 들어가 ‘새로운 경로’들이 발생하는 방식을 주시합니다. 한수지 작가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유영하면서도 그것의 정치성이나 유희적 기능에 함몰하는 대신 그에 대한 사유의 틀을 끊임없이 모색합니다. 그의 작품 세계가 단지 디지털과 온라인 환경 속의 권력 관계에 대한 어렴풋한 관찰이나 어설픈 저항으로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상응하는 다른 체계들을 통해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물리학, 해양생물학, 신경과학을 통해 디지털 세계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을 통해 디지털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는 디지털의 원리와 기능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의도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디지털을 통해 현상의 미시적 차원이나 뇌의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디지털 세계로 ‘번역’되는 아날로그 세계들은 통찰과 오해를 동시에 제공합니다. 모든 번역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새로운 경로들은 오역을 통해 생성됩니다. 4차원 시공간을 확장하는 또 다른 차원으로서의 디지털 평면****, 방대한 데이터 바다에서 부유하는 비트플랑크톤***, 뇌 속의 기억처럼 소거되지 않고 생존하는 좀비쿠키** 등은 아마도 오역의 단상들입니다. 오역은 팽창하는 세계 속의 처세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을 가르는 단단한 벽과 타협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오역은 또한 상상의 날개이기도 합니다. 오역은 고립된 세계들을 연결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역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변종이 발생하는 유기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오역은 자연의 질서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 <오늘 나는 단어 아마도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II>(2020)
** <지워지는 방법>(2020)
*** <플랑크톤과 비트 플랑크톤>(2019)
**** <납작하고도 납작한 공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019)
__________
© 2021 작가, 저자,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본 웹사이트(지면)에 수록된 콘텐츠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작가, 저자,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있으며, 저작자와 서울시립미술관의 서면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원고는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Perhaps A Message for An Audience (of The Work by Suji Han)
Seo, Hyun-Suk
Suji Han began to exchange texts — like in a word chain game — with the Brazilian artist Daniela Avelar, whom she met at a residency in Finland. Han was working on a series that explored the limits and possibilities of communication through language. The exchange first started like a game but developed into the sharing of genuine ideas, and this inspirational trading continued online after they returned home. Hoje vou experimentar a palavra talvez Part 2 (Today I will start a day with the word ‘maybe’ Part 2, 2020) seems to summarize the tentative conclusion that this linguistic exchange eventually reaches. In the film, two speakers read each line in their own language. Unless the viewer knows both languages they cannot know whether these two sequences are actually translating each other. The sentences of Suji Han delivered in Korean (like the lines of Avelar who is speaking in Portuguese) extend into questions about translation itself. The work creates a context surrounding translation, instead of the direct act of translation itself.
According to her, translation is not “the process of transferring one language to another,” as every practice that converts one form of data into another form of data is translation. The issue of translation summons basic questions about the form of data. In her master’s thesis, Suji Han’s definition of data is “a phenomenon, memory, fact, or emotion of 3D space being converted flat and saved.” There is no such action that strictly carries ‘the original meaning.’ The original form has to go through countless conceptual, physical variations and distortions before reaching the neurons of a receiver. Just like how data is in a digital world. The speaker claims that translation is therefore a process that paves a myriad of ‘new ways.’* In that context, translation is organic because new ideas are constantly generated, cultivated, transformed, and extinguished. A message does not ‘arrive’ to a receiver but ‘develops’ a new path of translation.
The process of how the speaker’s words in the film reach the audience’s neurons can also be ‘translation,’ even if a person who is fluent in Korean hears the lines spoken in Korean, it cannot be the delivery of an ‘intact original’ that is free from deformation. Even though the conversation was made in the same language, the linguistic sense of each speaker is unstably oscillating, and communication is initiated crossing in and out of the range of oscillation that overlaps multidimensionally. The speaker says it “embeds convention, system, power, and hegemony.”* In other words, you are ‘translating’ this message written in Korean based on your sense and worldview.
The physical form of data also undergoes a radical variation. The body signal of the artist is delivered to a microphone through the air waves, transferred to an electric signal, and converted to digital data, simultaneously being saved in numbers fragmented by a binary system. Then it is transferred into air waves again by a device or speaker that ‘plays’ this series of numbers and stimulates the ear of receivers. Calling this series of technical, physical processes a ‘translation’ establishes a conceptual expansion. Under this extended reasoning, an intent to adopt an essence intact is impossible. (This article that describes Suji Han’s practice is also a process of creating a new thinking, instead of adapting her original intention.) A message transforms its shape “like Ditto of Pokemon.” ****
(In this context, language is also a part of nature. It is a world dominated by an organic order where variants occur endlessly. Being infected with the coronavirus or the physiology of the immune system can also be a form of translation. A language functions in correspondence with a natural order.)
If all data must go through deformation, will external deformation be equated to the deformation of its essence? Or, is there an essence that is never changed? Is a message different if the language is different? How is communication possible with such deformation?
Under the idea of ‘poststructuralism’ in the humanities, language unfolds through infinite and organic flows instead of organizing a network of limited meanings. This is the way of reasoning in the late 20th century. Here, how a meaning is “blurred, vague, or ambiguous”* is a natural phenomenon. In fact, an ‘original meaning’ that is not deformed, modified, or distorted does not exist. What accompanies countless re-edits and variations, such as “expanding, deleting, copying, pasting, composing, distorting, twisting, cropping, and so on,”**** is ‘translation.’ This is the form of all kinds of communication. How this principle works is closer to forms of mistranslation. Considering the degree of ‘mistranslation’ that oscillates within the error range, we can only assume that ‘a message is delivered’ somehow. The message delivered to you through this article is also only roughly close to perhaps what is presumed to be my intention. Of course a precise message does not exist. That is nothing more than an association of possibilities made of fog.
Of course my intention of delivering this obsolete message taking the risk of variation, modification, and distortion is not to support the humanities of the 20th century. Emerging ideas regarding universal ways of communication, regardless of the media or material, is interesting because it overlaps in the era of digital technological advances. Looking back now, poststructuralism sounds like the suggestion of the principle of digital technology. The way that technology works must be similar to the way a man thinks. Digital data continues to be re-edited and reprocessed. Actually, one quote from Suji Han’s work above was not about ‘translation’ but a digital environment. Technologies like “expanding, deleting, copying, pasting, composing, distorting, twisting, cropping, and so on” are general functions of the digital. Premising ‘an original’ that is free from re-edits or reprocessing is never possible in both the digital world or poststructuralism. Supposedly “the start and end points do not exist in translation,”* it applies to the same in the digital. The digital is a language. It opens the grounds for massive ‘mistranslation.’
(In this context, the digital is also a part of nature. It is a world dominated by organic orders where variants occur endlessly. The digital functions in correspondence with the natural order.)
The digital reorganizes human thinking structurally. An interesting fact is that the digital goes even further to make a counter proposal about human thinking and the perspective of ‘translation.' The meaning of translation adapted in the digital era indicates all practices to change the form of data. Every digital representation is, in other words, the process of translation and all translated figures resemble digital forms. Both are mirrors as well as expansions of human intelligence.
The critical issue here is that both language and the digital operate according to a huge organization and rules behind the dimension of visual presentation. According to Suji Han, it is more interesting to observe little severances, nodes, and new channels instead of understanding that overall, enormous pattern and achieving a systemized, comprehensive knowledge.* I believe it is because of the structural secret that lies in the little nodes. Observing them is similar to the practice of scientific investigation at the actual scene where ‘mistranslation’ occurs. At the scene, the evidence about the digital properties or performance principle of language awaits interpretation or misinterpretation. It is a scene where “a phenomenon, memory, fact, or emotion in 3D space is converted flat and saved.” (The meaning of ‘save’ of course includes the possibility of variation.) It is a matter of how an immaterial phenomenon, ‘meaning’, is conveyed into ‘physical’ 3D space. Can an invisible phenomenon like a spirit or mind really create an interface with the materiality of 3D space?
I cannot understand this secret. Instead, I can only think of one great physicist who left some insights.
Erwin Schrödinger identified the matter of consciousness by the interface between physical and immaterial worlds. How can physically conveyed signs interact with the immaterial realm? How can the air waves that run through neurons reach an immaterial consciousness? Exploring the world of tiny particles, the physicist faced the solid wall of the immaterial world. He declared, no matter how much science has accomplished, one can never acquire the knowledge of the point where material and non-material meet.
Individual men of the 21st century depended on the approximate signification in each of their severed worlds. ‘Communication’ may be a conceptual defense mechanism against such necessary isolation.
Suji Han approaches where this severance occurs in the digital world, which is also an area of translation, to observe the way that ‘new channels’ are initiated. Floating inside the digital world, Suji Han constantly seeks its frame of reason, instead of sinking into its politics or entertainment. The reason why her world of artworks does not merely remain as vague observation or lame resistance against power relations in the digital and online setting is because she asks questions through other corresponding systems. She perceives the digital world through physics, marine biology, or neuroscience. Of course, the work cannot explain what the digital is through them. Suji Han does not seem to intend an overall understanding about the digital principle or function. The work cannot describe a microscopic dimension of a phenomenon or the operation of a brain through the digital. The analog worlds that are translated by the digital world provide both insight and misconceptions at the same time. Just like how all translations proceed. The new channels are initiated by mistranslations. A digital plane as another dimension****, a Bit Plankton drifting in the enormous ocean of data***, and the zombi cookie that is not eliminated and survives like memories**are maybe the fragmented idea of mistranslation. Mistranslation is also an art of living in an expanding world. That would be a way to compromise with the solid wall that divides material and immaterial. Mistranslation also gives wings for an imagination. Mistranslation is the way of connecting isolated worlds.
(In that context, mistranslation is also a part of nature. It is a world dominated by organic order where variants occur endlessly. Mistranslation functions in correspondence with natural orders.)
* Hoje vou experimentar a palavra talvez Part 2 (2020)
** How to be Forgotten (2020)
*** Plankton & Bit Plankton (2019)
**** Welcome to Flattened Flat Space (2019)
_________
© 2021 Artist, Author, SeMA Nanji residency. The copyright for the content on this website belongs to the artist, author, and Seoul Museum of Art, and cannot be used without the written contsent of the author and Seoul Museum of Art.
This article was written as part of the SeMA Nanji residency pro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