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국문/ENG
비트콘드리아와 비-비트콘드리아와의 공생
혼종화의 전제는 ‘관계’다. 인간은 인공물 또는 다른 종과 관계를 맺으며, ‘기술적 키메라’가 되었고, 다른 객체들도 혼종적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상호작용적 관계에 의해 ‘관계적 주체’로 변신 또는 확장하고 있다. 지금, 혼종화되지 않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혼종화야말로 지금 이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다.1) 모든 존재가 혼종화되었다. 디지털 매체는 이러한 혼종화 현상에 또 다른 ‘전환’을 가져왔다.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을 가시화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들도 가시화를 통해 그 존재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가짜와 진짜가 혼종화되고,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페르소나’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한수지는 디지털 정보와 물질성의 혼종화에 주목한다. 특히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비트콘드리아(Bitchondria)’이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비트콘드리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그것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그녀가 비트콘드리아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존재가 가상과 물질이 혼종화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트콘드리아는 디지털 속성인 ‘비트(bit)’와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근원인 ‘미토콘드리아(mitchondria)’가 혼종화된 존재다. 아주 근원적으로 혼종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수지는 비트콘드리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활동 방식들을 조심스러우나 그러나 집요한 시선으로 쫓아가고 있다(한수지, <비트콘드리아(xn,yn,zn)>(2022)). 그녀에 따르면, 비트콘드리아는 거시세계와 미시세계 그리고 물질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경계를 해체시키면서 이를 혼종화한다. 비트콘드리아는 경계를 횡단하는 탈경계적 존재인 것이다. 비트콘드리아의 존재의 흔적을 쫓는 그녀의 시선 또한 혼종화되어있다. 때로는 과학자의 시선으로, 또 때로는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또 때로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를 탐색한다. 결국 그녀는 ‘탐정’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를 탐색한다. 탐정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의 과거의 흔적 그리고 현재의 움직임의 경로 등을 추적하고 이를 시각화한다.
추적의 과정에서 그녀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비트콘드리아가 활동하고 있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 작용이다. 공간과 활동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트콘드리아는 물질적 공간뿐만 아니라, 디지털 공간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또 이러한 공간에서 다양한 객체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공간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특히 디지털 공간에서의 비트콘드리아의 경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적한다.
비트콘드리아가 ‘비트’를 존재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디지털 가상(Digitaler Schein)’으로 이 세계에 등장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공간에 대한 선이해가 요청된다. 디지털 가상은 일종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다. 디지털 세계를 주어진 세계가 아니라, 만들어진 ‘대안적 세계’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적극적으로 디지털 가상의 존재론적 증명에 집중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디지털 가상이 ‘가상’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했다고, 이를 무시하고 또 이를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상은 대안적 세계이며, 결국 현실적인 존재가 되었다.2) 주어진 세계와 만들어진 대안적 세계 간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모든 세계가 이미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세계 모두 그저 ‘현상’으로 존재한다. 현상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를 이렇게 이해한 후, 플루서는 대안적 세계를 옹호한다. 더 나아가, 그 세계가 갖는 공간적 또는 가상적 특징과 또 그 대안적 세계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상상력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그는 비트로 만들어지는 대안적 세계의 특징을 ‘피상성(Oberflächlichkeit)’이라고 규정한 후, 이에 대해 ‘예찬(Lob)’한다. 이제 이러한 세계들에 거주하며, 또 공간을 횡단하는 존재들에 대해 의심의 눈을 거두고, 이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디지털 가상은 이제 당당히 ‘비인간’ 계열에 진입했다. 디지털 가상은 디지털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의 물질세계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이 또한 혼종화를 체험한다. 다른 생명체, 물질 그리도 더 나아가 인간과의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고 진화한다. 디지털 가상도 이제 ‘다종’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한수지의 작품 세계는 여러모로 플루서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디지털 가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렇다. 그녀는 디지털 공간의 특징을 ‘납작하고 납작한 공간(Flattened Flat Space)’(한수지, <Welcome to Flattened Flat Space>(2019))라고 본다. 이 공간의 납작함은 스크린 또는 모니터에서 평면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기계적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 납작하게 보이는 이 공간은 보이는 것과 다르게 매우 깊고 깊은 공간이다. 너무나도 깊기에 그 누구도 공간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지금 도달해있는 공간과 연결된 새로운 공간이 끝없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트콘드리아는 이 공간의 깊이를 체험하고, 여기서 기꺼이 관계를 맺는다. 공간 그 자체와 그 공간에서의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맺기 위해 비트콘드리아는 이 공간은 탐험한다. 유목적 그리고 횡단적 주체가 되어 이 공간을 부유한다. 그 탐험의 결과는 ‘진화’다. 해파리 주스와 만나서 존재 방식이 변하게 된다. 무한 증식과 무한 반복이 가능해졌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디지털 가상으로 존재하는 스미스 요원처럼 말이다. 공격받으면 받을수록 무한 복제를 통해 증식되는 스미스 요원처럼 말이다. 비트콘드리아의 삶이 그렇다.
한수지는 비트콘드리아의 삶(?)을 단순히 추적하지 않고, 비트콘드리아를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에 알려준다. 비가시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화는 방식도 다양하다. 렉처 퍼포먼스, 강연, 설치 그리고 이미지 작업 등을 통해 비트콘드리아의 존재 방식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 그녀는 때론 과학자의 시선으로 또 때로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비트톤드리아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또 비트콘드리아의 동료들을 찾아내고, 이들의 삶도 추적하고 있다.
해파리 주스에서 제논 피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공간에 숨어있던 혼종화된 존재들을 끄집어내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비트콘드리아 이후 발견된 이들은 비트콘드리아보다 진화했다. 좀 더 진화된 ‘몸체’를 가지고 외부를 감각하고, 이를 자신의 몸체에 체현하고 있다. 감각의 확장이 진화와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진화된 비트콘드리아와 그의 친구들은 디지털 공간과 물질적 공간을 횡단한다. 이들은 횡단하는 객체다. 아직은 말이다. 이들은 공간과 관계 그리고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곧 스스로 주체가 될 것이다. 주체가 된 비트콘드리아와 그의 동료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비-비트콘드리아’들의 세계 또한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비-비트콘드리아들의 존재들을 인정하고, 이들과 더불어 하는 삶, 즉 ‘공생’에 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비-비트콘드리아들도 마찬가지다. 멀지 않아 이들은 ‘비인간’이라는 개념을 비웃을 수 있다. ‘비인간? 누구 맘대로’라고 말이다.
1) 참조: 심혜련, 『21세기의 매체철학: 디지털에서 포스트 디지털로』, 그린비, 2024, 24쪽.
2)참조: Vilém Flusser, “Digitaler Schein”, in: Digitaler Schein: Ästhetik der elektronischen Medien, Florian Rötzer (Hrsg.),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1991, S.147-148.
국문/ENG
비트콘드리아와 비-비트콘드리아와의 공생
심혜련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인간 이후(post-human)’의 세계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인간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의 모습과 삶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이야기한다. 논쟁의 핵심은 여전히 인간이며, 인간이 어떻게 ‘탈중심화’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탈인간화’의 관점에서 인간 이외의 객체들을 중심으로 한 논쟁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심적 사유로 인해 단순하게 ‘비인간(the inhuman)’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었던 다른 종들과 사물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전자의 경우, 논쟁의 핵심은 ‘주체성’이며, 후자의 경우는 ‘객체성’이다. 그런데 이 둘 모두에게 중요한 변화로 언급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혼종화(hybridization)’이다.혼종화의 전제는 ‘관계’다. 인간은 인공물 또는 다른 종과 관계를 맺으며, ‘기술적 키메라’가 되었고, 다른 객체들도 혼종적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상호작용적 관계에 의해 ‘관계적 주체’로 변신 또는 확장하고 있다. 지금, 혼종화되지 않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혼종화야말로 지금 이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다.1) 모든 존재가 혼종화되었다. 디지털 매체는 이러한 혼종화 현상에 또 다른 ‘전환’을 가져왔다.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을 가시화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들도 가시화를 통해 그 존재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가짜와 진짜가 혼종화되고,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페르소나’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한수지는 디지털 정보와 물질성의 혼종화에 주목한다. 특히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비트콘드리아(Bitchondria)’이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비트콘드리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그것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그녀가 비트콘드리아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존재가 가상과 물질이 혼종화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트콘드리아는 디지털 속성인 ‘비트(bit)’와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근원인 ‘미토콘드리아(mitchondria)’가 혼종화된 존재다. 아주 근원적으로 혼종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수지는 비트콘드리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활동 방식들을 조심스러우나 그러나 집요한 시선으로 쫓아가고 있다(한수지, <비트콘드리아(xn,yn,zn)>(2022)). 그녀에 따르면, 비트콘드리아는 거시세계와 미시세계 그리고 물질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경계를 해체시키면서 이를 혼종화한다. 비트콘드리아는 경계를 횡단하는 탈경계적 존재인 것이다. 비트콘드리아의 존재의 흔적을 쫓는 그녀의 시선 또한 혼종화되어있다. 때로는 과학자의 시선으로, 또 때로는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또 때로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를 탐색한다. 결국 그녀는 ‘탐정’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를 탐색한다. 탐정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의 과거의 흔적 그리고 현재의 움직임의 경로 등을 추적하고 이를 시각화한다.
추적의 과정에서 그녀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비트콘드리아가 활동하고 있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 작용이다. 공간과 활동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트콘드리아는 물질적 공간뿐만 아니라, 디지털 공간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또 이러한 공간에서 다양한 객체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공간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특히 디지털 공간에서의 비트콘드리아의 경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적한다.
비트콘드리아가 ‘비트’를 존재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디지털 가상(Digitaler Schein)’으로 이 세계에 등장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공간에 대한 선이해가 요청된다. 디지털 가상은 일종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다. 디지털 세계를 주어진 세계가 아니라, 만들어진 ‘대안적 세계’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적극적으로 디지털 가상의 존재론적 증명에 집중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디지털 가상이 ‘가상’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했다고, 이를 무시하고 또 이를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상은 대안적 세계이며, 결국 현실적인 존재가 되었다.2) 주어진 세계와 만들어진 대안적 세계 간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모든 세계가 이미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세계 모두 그저 ‘현상’으로 존재한다. 현상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를 이렇게 이해한 후, 플루서는 대안적 세계를 옹호한다. 더 나아가, 그 세계가 갖는 공간적 또는 가상적 특징과 또 그 대안적 세계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상상력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그는 비트로 만들어지는 대안적 세계의 특징을 ‘피상성(Oberflächlichkeit)’이라고 규정한 후, 이에 대해 ‘예찬(Lob)’한다. 이제 이러한 세계들에 거주하며, 또 공간을 횡단하는 존재들에 대해 의심의 눈을 거두고, 이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디지털 가상은 이제 당당히 ‘비인간’ 계열에 진입했다. 디지털 가상은 디지털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의 물질세계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이 또한 혼종화를 체험한다. 다른 생명체, 물질 그리도 더 나아가 인간과의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고 진화한다. 디지털 가상도 이제 ‘다종’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한수지의 작품 세계는 여러모로 플루서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디지털 가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렇다. 그녀는 디지털 공간의 특징을 ‘납작하고 납작한 공간(Flattened Flat Space)’(한수지, <Welcome to Flattened Flat Space>(2019))라고 본다. 이 공간의 납작함은 스크린 또는 모니터에서 평면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기계적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 납작하게 보이는 이 공간은 보이는 것과 다르게 매우 깊고 깊은 공간이다. 너무나도 깊기에 그 누구도 공간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지금 도달해있는 공간과 연결된 새로운 공간이 끝없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트콘드리아는 이 공간의 깊이를 체험하고, 여기서 기꺼이 관계를 맺는다. 공간 그 자체와 그 공간에서의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맺기 위해 비트콘드리아는 이 공간은 탐험한다. 유목적 그리고 횡단적 주체가 되어 이 공간을 부유한다. 그 탐험의 결과는 ‘진화’다. 해파리 주스와 만나서 존재 방식이 변하게 된다. 무한 증식과 무한 반복이 가능해졌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디지털 가상으로 존재하는 스미스 요원처럼 말이다. 공격받으면 받을수록 무한 복제를 통해 증식되는 스미스 요원처럼 말이다. 비트콘드리아의 삶이 그렇다.
한수지는 비트콘드리아의 삶(?)을 단순히 추적하지 않고, 비트콘드리아를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에 알려준다. 비가시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화는 방식도 다양하다. 렉처 퍼포먼스, 강연, 설치 그리고 이미지 작업 등을 통해 비트콘드리아의 존재 방식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 그녀는 때론 과학자의 시선으로 또 때로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비트콘드리아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비트톤드리아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또 비트콘드리아의 동료들을 찾아내고, 이들의 삶도 추적하고 있다.
해파리 주스에서 제논 피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공간에 숨어있던 혼종화된 존재들을 끄집어내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비트콘드리아 이후 발견된 이들은 비트콘드리아보다 진화했다. 좀 더 진화된 ‘몸체’를 가지고 외부를 감각하고, 이를 자신의 몸체에 체현하고 있다. 감각의 확장이 진화와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진화된 비트콘드리아와 그의 친구들은 디지털 공간과 물질적 공간을 횡단한다. 이들은 횡단하는 객체다. 아직은 말이다. 이들은 공간과 관계 그리고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곧 스스로 주체가 될 것이다. 주체가 된 비트콘드리아와 그의 동료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비-비트콘드리아’들의 세계 또한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비-비트콘드리아들의 존재들을 인정하고, 이들과 더불어 하는 삶, 즉 ‘공생’에 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비-비트콘드리아들도 마찬가지다. 멀지 않아 이들은 ‘비인간’이라는 개념을 비웃을 수 있다. ‘비인간? 누구 맘대로’라고 말이다.
1) 참조: 심혜련, 『21세기의 매체철학: 디지털에서 포스트 디지털로』, 그린비, 2024, 24쪽.
2)참조: Vilém Flusser, “Digitaler Schein”, in: Digitaler Schein: Ästhetik der elektronischen Medien, Florian Rötzer (Hrsg.),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1991, S.147-148.